[SP Edition] 임찬민 "8할의 열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조금 더 특별한 이야기, 배우 임찬민 편
'나'를 돌아보는 솔직한 시간

김은정 기자 승인 2020.04.24 19:05 | 최종 수정 2020.04.24 19:59 의견 0

휴식기의 배우를 만나는 건 특별하다. 어떠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임찬민과는 만나기 전부터 무슨 대화를 나눌지 함께 고민했다. 거울을 보고 말하는 듯한 ‘나는…’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결국 깊은 이야기는 현장에서 탄생했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알아갈 것이고, 궁금해하지 않는 분들은 계속 모를 것이다. 그런 것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 또 과연 내 말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에 앞서 그는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봤다. 냉철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엄격한 사람이지만 눈치 보지 않는 솔직함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나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사람”
나의 보이는 면은 짱구 이마에 짙은 눈썹을 가진 주먹밥 쿵야를 닮은 이미지다. 한 팬분이 ‘해적’ 루이스 의상을 입은 모습에서 쿵야가 보인다고 편지에 그려서 보내주셨는데 닮았더라.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글동글한 이미지로 많이 봐주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밥알이 꽉 찬 주먹밥이 되고 싶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나만 아는 내 모습은 생각보다 귀엽지 않다. 나는 상당한 원칙주의자다. 현재 맡은 바 상황에 어긋나면 힘들어한다. 뮤지컬 ‘해적’ 첫 무대도 그런 맥락이다. 내 몸이 아픈 건 제2의 문제인데 그게 앞서면서 흐트러졌다. 그래서 힘들었다. 나에게 확고한 기준점이 있다 보니 타인이 원칙을 흔들어 놓는 행동을 하면 힘들다. 얼굴에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럴 때는 혼자 괴로워한다.

“나는 나무 같은 사람”
아주 키가 큰 플라타너스는 아니다. 작지만 옹골찬, 위로 길게 자라지는 않아도 땅속에 깊게 뿌리 내리고 싶은 나무다. 가지가 꺾여도 절대 죽지 않는 나무. 노래하면서 ‘나는 나무다’ 생각하며 뿌리가 땅 아래로 뻗어 나가는 상상을 한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인데 몸을 악기로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어느 순간 힘든 일이 왔을 때도 ‘이게 다 밑거름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한 선배가 ‘슬픈 일 기쁜 일 모두 배우에게 쓸모 있다’는 말을 해줬다. 굉장히 공감한다. 모든 감정이 흙이 되고 살이 될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작은 나무지만 내 뿌리는 맨틀까지 뻗어 나갈 테야”
나는 미러링이 강하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반대의 경우도 똑같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생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참 많더라. 나는 선후배나 언니동생 사이를 떠나 친구처럼 지낸다. 애초에 선배라고 할 만큼 무언가를 해주지 못했다. 우리나라 구조 자체가 나이나 직책으로 나눈다. 사회생활에서 내가 있는 곳의 아쉬운 부분인 것 같다. 나이가 더 많고, 조금 더 오래 했다는 이유로 동생 혹은 후배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아…’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은 나이를 떠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세상이잖나. 한두 살 나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많다. 나는 공연계, 대학로에 들어오면서 ‘절대 나이로 감투 쓴 것처럼 행동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금도 계속 생각하는 부분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무심코 그런 행동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언니로서는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나를 언니로 따르는 여동생들을 볼 때면 정말 예쁘다. 물론 남동생도 많지만 여동생들은 특별하다. 뮤지컬 ‘앤(Anne)’ 했던 송영미, 김이후 등과는 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남들이 모르는 나는...”
’완벽’이라는 단어가 형체는 있지만, 나 자신을 투영해 생각하면 저 먼발치에 있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해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 같다. 원칙적인 부분은 부모님의 성향을 닮았을 수도 있다. 남에게 그런 면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면인 것 같다.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에도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성향이 반영된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작가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런 캐릭터는 색채 자체가 사고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성향을 닮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자유분방하고 본능적으로 사는 역을 맡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아직 못해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활패턴이 된다면 다른 문이 열릴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서 연기한 인물들이 내 성향에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다.

하고 싶은 배역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알론조 키하나. 상상하는 대로 사는 분이잖나. 또 나의 냉정한 면을 살린 냉철한 캐릭터도 연기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선한 역을 많이 맡았는데 남들 눈에 ‘진짜 나빴다’고 보일만 한 악역도 해보고 싶다. 

 

“8할의 열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2월생이라 학교에 빨리 들어갔다. 키가 작고 남보다 학습이 느렸다. 나중에 부모님께 ‘사실 나 힘들었다’고 말했다. 1년 선행하는 게 계속 버거웠다. 그때 열등의식이 어마어마했다. 당시 낮은 자존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수능도 언어영역을 잘 봐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데, 대학에 들어가서야 오히려 다양성이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왜 나는 계속 앞에 서야 하지, 왜 나는 다른 아이보다 머리 하나가 작을까?’ 고민했다. 지금 돌아보면 작아서 느끼는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싶다. 저녁 시간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나는 누굴까’ 생각했다. 물론 찾지는 못했다.(웃음) 성장 호르몬이 나오는 오후 시간에 자야 했는데 잠이 너무 안 왔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했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말할 정도로 정말 노래를 좋아했다. 동요 대회도 많이 나갔고 수상도 했다. 여자도 변성기가 온다. 성악적으로 넘어가야 하는 시기가 왔는데 그때 선생님이 ‘넌 체형도 작고..’라면서 부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사형선고 같았다. 사춘기에 자존감 낮고 열등감이 컸던 시절이라 ‘너는 재능이 없다’고 못 박는 것 같았다. 같은 반에 조수미의 아리아를 부를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저런 친구가 성악을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 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래했지만 치고 나갈 정도로 ‘노래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할 수 없었다.

이후 어른이 되었는데 그때도 나는 어른이 아니었다. 계속 막내인 상황을 겪으면서 대외적으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이미지가 구축됐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왜 이렇게 계속 부족하지’ 파고들었다. ‘나는 왜 부족할까’라는 결핍 자체가 나를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 우등반-열등반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열등반이었다. 3학년이지만 사고가 2.5학년이었으니까. 체격적인 면에서도 난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넌 너무 부정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래서 ‘긍정적’인걸 알게 됐다.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부정적인 면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다. 30대가 넘어가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인복 많은 건 내 자랑이다.

“아빠 세대와 너는 달라”
아버지를 많이 존경한다.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아빠 세대와 너는 다르다. 너는 지금보다 10살 어리다고 생각하며 살아도 된다.” 배우 시작하고 힘들어할 때 해준 말이다. 어느 날 내가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적힌 봉투에 용돈을 넣어서 드렸는데 아버지가 “난 이 말이 제일 싫다”고 하셨다. ‘어떻게 사람이 꽃길만 걷고 사느냐’는 말이었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더라. 계속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지 깊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열등해 본 자가 빛을 느낄 수 있다”
계속 밝은 곳에만 있던 자는 어둠을 견딜 수 없다. 열등감을 느껴본 자가 어두운 곳에서 빛이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둠을 아는 사람은 빛이 들기 시작하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어둠에서 무리하게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스스로 폭력일 수도 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사람들은 왜 긍정만 강요하는 걸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푸쉬하지 않고 지켜봐 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버티는 힘에 대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와 생애 마지막 김장을 함께 했는데, 굴 파는 아저씨랑 5,000원에 옥신각신 하던 게 기억난다. 그 모습을 전봇대 뒤에 숨어 보고 있었다. 또 나를 보고 ‘아이고 우리 훌륭한 사람~’하며 웃어주던 얼굴도 무한 리플레이로 재생된다. 누구에게나 사소한 기억이 있다. 부모님과 주말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며 오징어를 뜯어먹던 기억 같은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 조카처럼 무해한 존재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순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느낀다. 작은 아이를 보며 ‘이 작은 인간의 마음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기억 저장소 중 하나를 꺼내 플레이하는 것으로 버티는 힘이 생긴다. 조용히 명상하며 떠올리기도 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계속 떠올리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이뉴스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